절기 설교

제목 주는 그리스도 (1)   [사 53: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4.02
종려주일을 맞아 그 유래와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미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속하기 위해 받으신 고난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종려주일의 유래와 의미

먼저, 종려주일의 유래가 된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2천여 년 전,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닷새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제자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는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앞뒤로 옹위해 내려오지요. 어떤 이들은 나귀 새끼가 지나가는 길 위에 자기 겉옷을 깔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늘어놓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는 소리가 드높지요.
이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했지요.
이때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처럼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입성하셨지요.
바로 이 일을 기념하는 날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던 무리가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혹은 길에 깐 나무가 종려나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나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금요일, 십자가에 달린 지 여섯시간 만인 오후 세 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장사한 지 사흘째인 일요일 새벽,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지요.


2. 그리스도의 의미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라”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되셨지요. 그러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지,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했지요. 즉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의미입니다. 미래형이지요.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지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임에 임명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시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공의의 법을 어김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이들을 주님께 내어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원수 마귀 사단의 종 되었던 인생들을 되찾아 오심으로써 천지 만물의 참 주인 곧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를 뜻합니다.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이처럼 다르며 그 권세도 크게 차이 납니다.


3.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들의 의미

예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과정은 이름에 한 단어만 덧붙이면 되는 일처럼 결코 쉽거나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한마디 말씀도, 사소해 보이는 행동 하나도 의미 없이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씨실과 날실을 정교하게 엮어 한 장의 고운 옷감을 만들듯 모든 일을 정확한 뜻과 섭리 가운데 행해 나가셨지요. 그러는 동안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실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죄 사함의 공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는 물론 온몸을 던져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결국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실 정도로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비로소 구원의 섭리가 공의 가운데 정확하게 꿰어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전반 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지요. 이는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은 사람이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손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얼마나 많이 하며 발로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얼마나 많이 갑니까?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심판과 무서운 형벌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죗값을 치르게 하라 명하십니다. 즉 사람에게 악의 가운데 해를 입히면 그 사람에게 똑같이 상해를 입히게 했지요. 이는 죄에 대한 공의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정확한 공의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는 죄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대로(롬 6:23) 영적인 사망, 곧 지옥의 영벌에 떨어집니다. 이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 손과 발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3~45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지요.
여러분이 지옥의 무서움을 정녕 안다면 손발을 자르는 고통이 지옥의 고통보다 훨씬 낫다고 중심에서 고백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이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혀 죗값을 치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이제는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기를 힘쓸 때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씻긴다고 하였지요.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한 대로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그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사형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순간에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중이 아래로 쏠려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호흡 곤란, 탈진으로 인한 갈증, 독충이 피를 빠는 괴로움과 수치를 느끼며 서서히 죽어 가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로 다 표현 못 할 고통을 당하신 것은 속죄의 공의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보여 줍니다. 대충 적당히 값을 치른다고 해서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원리와 공의에 맞는 희생이 반드시 따라야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 가운데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시되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지요. 여기서 ‘율법의 저주’란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 임한 저주를 의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대로(롬 6:23) 우리는 율법을 어김으로써 ‘사망’이라는 저주를 받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죄인처럼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는 예언이 응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 아니라 창과 가시에 찔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한 대로 로마 군병은 창으로 이미 운명하신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이 먹잇감의 숨통이 이미 끊어진 것을 알고도 그 시체를 사납게 찢듯이 말입니다. 이는 사람의 잔인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를 나타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악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온전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과 사람인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창에 찔리심으로 흘러나온 ‘피’는 바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보혈이요, ‘물’은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능력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날카로운 가시에도 찔리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길고 날카로운 가시 줄기로 사람의 머리보다 약간 작은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꾹 눌러 씌운 것입니다. 그 독한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를 파고들면서 살을 찢었고 얼굴은 피로 물들었지요. 이는 바로 미움, 시기, 질투, 판단, 정죄, 간음, 탐심 등 사람이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들을 사해 주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성경은 마음에 죄를 품는 것이나 생각으로 범죄하는 것도 다 죄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했고, 요한일서 3장 15절 전반 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했지요. 이렇게 생각과 마음에 품은 죄들은 결국 행위적인 범죄로까지 드러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생각과 마음까지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사역하시는 동안 허기와 곤함을 다 견디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는 무서운 채찍과 커다란 못, 가시 면류관의 아픔을 참아 내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고난을 이기셨고 인생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든 고난을 견디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말입니다.
여러분이 새 생명을 얻어 호흡하고 있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리고 있는 것도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요, 이 사랑의 힘으로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진홍같이 붉은 죄로 물든 마음도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지요. 몸과 마음의 거룩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속히 마음의 성결을 이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과 위로를 드리시기를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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