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 (6)   [창 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4.03.22
지난 시간에는 "신(神)"과 "영(靈)"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신(神)은 형상에 중점을 둘 때 붙인다 했고, 영(靈)은 마음에 중점을 둘 때 붙인다 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 개역 한글판에는 이런 영적인 의미가 잘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성경 중에는 이런 영적인 의미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하면, 한국어와 표현이 다르다 해도 말씀이 잘 이해되실 줄 압니다.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언어권에서는 혹여 신과 영이 같은 단어로 표현됐다 해도 구약에서는 대부분 형상에 중점을 두었고, 신약에서는 마음, 곧 내면에 중점을 두었음을 기억하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호칭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종합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신(神)을 붙인 것은 형상에 초점을 둔 구약 시대의 표현이고, 영(靈)을 붙인 것은 마음에 초점을 둔 신약 시대의 표현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어렸을 때 아빠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면, 이 사람에게는 아빠라는 존재가 어떻게 와 닿을까요? 아빠라는 존재는 형식적인 관계로만 느껴지기 쉬울 것입니다. 자신에게 아빠의 보살핌이 필요하던 시기에 아빠가 곁에 없었으니, 이 사람은 아빠의 마음이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저 저분은 나를 낳아 주신 분이라는 형식적인 존재로만 느껴질 것입니다. 반면에, 어려서부터 항상 아빠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있어서 아빠는 나를 낳아 주신 분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빠"를 생각하면, 아빠가 자신에게 보여 준 사랑과 헌신이 함께 떠오르며 아빠의 마음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처럼 "아빠"라고 하는 한 존재도 마음에 와 닿는 정도와 사랑의 느낌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신"으로 표현하느냐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하느냐의 차이도 이와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신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유일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유일신인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물로 덮인 지구 위에 친히 내려오셔서 살피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31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성막을 짓는 기술자인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했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신(神)이다 하는 정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1장 38절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요셉을 가리켜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영
이러한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영"은 진리, 선, 사랑 등 하나님의 마음의 속성을 가리킨다 했습니다. 신약 시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9절 전반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임해 있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속성인 진리, 선,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에도 임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오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님의 분체인 성령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의 영"이라 표현한 이유는 단지 신적인 존재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4절에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믿는 사람들의 안에 계시며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인데, 여기서 "성령"으로 인도받는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다 표현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나가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의미까지 이 말씀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이처럼 어느 한 분의 역사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합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영"이 나올 때, 지금 말씀드린 내용을 기억하시면 그 구절이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2. 성부 하나님의 호칭들

1) 주체를 강조하는 표현 - 여호와의 신, 그리고 여호와의 영
먼저, 성부 하나님의 호칭인 "여호와의 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분리해 내신 분체를 가리키는 호칭 중의 하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친히 주체가 되어 많은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사들이나 선지자들과 분체로서 함께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능력과 지혜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사기 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사 옷니엘에게 임하심으로 그가 전쟁에서 이긴 기록이 나옵니다. 사사기 14장 6절에는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다" 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했습니다. 이 밖에도 구약 곳곳에 여호와의 신이 임재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호와"란 표현은 구약 성경에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또한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뒤에 영(靈)이 아닌 신(神)을 주로 붙인다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신"이란 표현만 가능하고 "여호와의 영"이란 표현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이란 표현이 구약 성경 열왕기상 22장 24절과 역대하 18장 23절에 나옵니다. 두 구절은 모두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한 말을 동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연합하여 아람과 전쟁을 하려 했습니다. 이에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전쟁의 승리를 장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미가야는 시드기야의 예언이 거짓임을 밝힙니다. "거짓말하는 영"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까지 치면서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영"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가 표현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중점을 두어 여호와의 영이라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악에 속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영이라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영"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원칙에서 벗어난 표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2) 속성을 강조하는 여러 가지 호칭들
"여호와의 신"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분리해 내신 분체를 가리키는 호칭 중의 하나라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분체로서 일을 하시는데, 어떤 일의 주체가 아버지 하나님의 분체임을 나타내고자 할 때는 "여호와의 신"이라 표현합니다. 앞서 옷니엘, 삼손,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던 예를 말씀드렸는데, 그처럼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고 한 것은 그들에게 감동함과 능력을 주신 분이 "여호와의 신"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아버지 하나님의 분체이지만, "여호와의 신"이라 표현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8장 3절의 "지혜로운 영", 이사야 4장 4절의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 베드로전서 4장 14절의 "영광의 영",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습니다. 각각 다른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때는 그 일의 주체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지혜, 공의, 영광 등 그 일을 이루신 아버지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럴 때는 구약 성경에서도 신(神)이 아닌 영(靈)을 붙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호칭도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나 직함이 있는가 하면, 성품이나 업적을 기리는 표현도 있습니다. 예로 들면, 모세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영도자"라고 하면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온 집에 충성한 사람", "온유함이 가장 승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때는 모세의 내면, 곧 충성됨과 온유함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도 각각의 고유한 명칭이 있는가 하면, 속성과 역할을 강조한 명칭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 주의 신, 주의 영, 성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한 명칭들입니다. 그런데 분체로 역사하실 때의 역할이나 그때 부각되는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표현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 명칭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3) 지혜로운 영, 그리고 지혜의 신
출애굽기 28장 3절에 보면, "지혜로운 영"이 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영"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인 지혜의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지혜"가 마음 안에 주어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36장 1절에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우셨다는 것은 지혜를 그에게 부어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의 속성 중 지혜에 중점을 둘 때는 구약에서도 "지혜로운 영"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11장 2절에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 했습니다. 또한 신명기 34장 9절에도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했습니다. 여기서는 왜 지혜로운 영(靈)이 아니라 지혜의 신(神)이라 했을까요? 이때는 지혜라는 속성 자체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지혜의 근본 되신 신(神)으로 인식하며 기록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면, "지혜의 신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영을 주세요."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특별히 하늘의 지혜가 더 필요하다면, "지혜로운 영을 부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지혜로운 영을 주셔서 당면한 문제를 쉽게 풀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구한다고 해서 누구나 항상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부터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성결을 이루어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지혜의 속성이 여러분 마음에 임합니다. 지혜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지혜로운 영으로 여러분 안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사리 분별을 잘하고 어떤 지식을 잘 활용해 나갈 때, "지혜롭다"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지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방법론이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주관되는 것이 바로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입니다. 마음의 악을 버림으로 선한 마음이 되는 만큼 가장 좋은 방법이 더욱 또렷하게 마음에 그려지는 것이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지혜로운 영의 역사입니다.

4.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

이사야 4장 4절에 보면,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 나옵니다.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권자로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 있고, 심판의 결과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9편 7-8절에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속성 중 특별히 공의의 속성을 가지고 분리된 분체가 바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입니다. 심판하는 영이 두루 살피며, 공의의 잣대로 각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잽니다. 또한 민족 단위나 나라 단위로도 재십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의 악행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넘으면, 소멸하는 영을 통해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늘에서 직접 불을 내려 소멸하시거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 등의 재앙으로 심판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곧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대 만에 가나안 땅에 돌아왔을 때는 아모리 족속을 비롯하여 일곱 족속이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되찾으려면 그 땅의 거민을 쫓아내거나 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그 땅 거민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이런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 해도, 이방 족속을 막무가내로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공의 가운데 심판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때가 되면 그 땅 거민들의 죄악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선에 이를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밝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를 전했습니다. 이는 신명기 9장 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직 공의로만 심판하시는 분일까요? 요나서를 보면 공의를 뛰어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도 니느웨 성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됐기 때문에 멸망의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으로 두루 감찰하신 결과입니다. 공의의 잣대로만 본다면, 니느웨 성은 이대로 심판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를 통해 멸망의 심판이 임박함을 알게 된 니느웨 백성들은 물론, 왕과 신하들까지도 금식하며 여호와께 부르짖고 죄를 회개했으며 악한 길에서 돌이켰습니다. 심지어는 짐승들까지도 금식을 시켰습니다. 이에 요나서 3장 10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혹여 환난이나 재앙을 만난 성도님이 계십니까? 더 이상의 어려움을 겪지 않기 원한다면, 니느웨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죄인의 길로 잘못 갔다 해도, 신속히 돌이켜서 의인의 길로 들어서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더 이상 징계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혹여, "나는 범죄해도 아무런 징계가 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육의 부모들도 다른 집의 자녀들이 잘못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범죄해도 하나님께서 일일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마지막 심판 때는 각자의 죗값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됩니다.
범죄해도 징계가 없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징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징계가 임박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징계가 원래 시점보다 늦춰졌을 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들을 징계하시기 전에 자녀들이 스스로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체벌하기 좋아하겠습니까? 매를 맞는 자녀도 아프지만, 때리는 부모도 마음이 심히 아픕니다. 부모가 매를 들기 전에 자녀가 스스로 돌이킨다면 더없이 좋지만, 자녀가 스스로 뉘우칠 기미가 안 보이면 부모는 매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진정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가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놔둘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범죄해도 징계가 없어요." 하는 분들은 "징계가 임하기 전에 스스로 돌이켜다오"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만큼 징계가 코앞에 임박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징계를 늦출 수 없는 공의의 시점에 이르면, 어떠한 징계가 임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토록 오래 참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려면, 지금 바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혹여 어둠 가운데 있는 분이라면, 지금 이 시간부터 빛으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음글 : 창세기 강해 (7)
이전글 : 창세기 강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