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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일서 강해(2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3:10-11 날짜 2011.10.16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씨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어서 죄를 지을 수가 없다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에게 “당신은 마귀의 자녀입니다.”라고 한다면 아주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자기 부모님을 모독한다고 여기며 벌컥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의 부모가 아니라 영적인 아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지요. 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둠의 세력에 속하게 됩니다. 세상 권세 잡은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대로 어둠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교회 다니지 않는 세상 사람들만 마귀의 자녀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 하는데 실상은 마귀의 자녀인 사람들이 있지요(요 8:39~44). 심지어 주의 종이나 장로들도 여기에 해당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기준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첫째는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에 맞는 말씀만 행하고 맞지 않는 말씀은 행하지 않는 것, 이해가 되는 말씀은 순종하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은 순종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은 의가 아닙니다.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전체를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행함이 “의”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세상 사람처럼 죄악이 가득하면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요.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세상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람도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지요.

물론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즉시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평가를 하십니다. 아직 신앙의 연륜이 오래지 않아서 말씀을 잘 모르고 행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자기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시지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대로 아직 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노력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 칭해 주십니다. 이렇게 노력해서 결국은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이지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는 둘째 기준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란 핏줄로 이어진 친 형제만이 아니라 일가친척과 이웃, 믿음의 형제들을 다 지칭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크다 하셨지요. 이 말씀대로 형제를 사랑하되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고 추우면 따뜻하게, 더우면 시원하게 해 줍니다. 아름답게 꾸며 주며 부족한 것은 채워 주고 허물이 있으면 덮어 주려고 하지요. 형제에게도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형제가 춥고 배고플 때 말로만 “불쌍하다” 하면 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어려운 일이 있는데 돕지 않고, 허물을 드러내서 지적하며 남들에게 전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짓고 사망으로 가는 사람은 진리를 가르치고 권면해서 회개시켜야 하지요. 그러나 영혼을 살리려고 애태우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의와 틀 속에서 상대를 찌르고 수군수군 헐뜯는다면 이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내고 시기 질투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는 등, 이렇게 사랑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11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 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소식이지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실 때 결정적인 순간에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고통만 감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33년이라는 세월 동안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보여 주셨지요. 호화로운 비단옷, 기름진 음식을 취하지 않고 가난한 삶을 사신 것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공생애 시작부터 이곳저곳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해서였지요.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심은 질병으로 받는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는 사랑입니다.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우리가 생각 속에 지은 죄를 대속하신 것이고 손발에 못 박히심은 우리의 손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나무에 달리신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인류의 저주를 대속하기 위함이고 피를 다 쏟고 죽으신 이유는 사망으로 가야 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제자들과 대화하고 함께 지내신 시간들, 무리들에게 나가 가르쳐 주신 말씀들, 병자들을 고쳐 주신 치료의 역사들,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신 눈빛, 이 땅에서 호흡하신 매 순간이 다 아버지의 사랑을 펼쳐 보이신 과정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고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사랑을 표현해 주고 싶어 하지요.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먹여 주고 싶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쓰다듬고 싶어 합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도 33년간 애틋한 사랑으로 인생들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가까웠을 때에도 장차 져야 하는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만큼 가르쳤고 이만큼 희생해 주었으니 이 땅에서 할 일은 다했다.’ ‘이제 나는 천국의 영광 중에 아버지 품에 다시 돌아가니 행복하다.’ 이렇게 홀가분하게 가신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짓누르는 짐은,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 잡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었지요. ‘지금까지는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사랑으로 가르치고 지켜 주었지만 이제 내가 떠나면 이 무리는 어찌하나’ 이런 염려와 안타까움 속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나 자신의 고통과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영혼들만을 생각하신 사랑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었기에 그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보여 주신 대로 제자들도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었지요. 상대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며 희생하고 헌신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다면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이 겉으로 믿음이 있는 척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에 불의가 가득하면서 충만하게 찬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는 척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영계는 정확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고 원수 마귀도 속일 수 없습니다. 정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도 그를 아실 뿐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도 알고 두려워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입으로 믿는다고 말해도 마음에는 믿음이 없다면 사단도 그 사실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할 때는 귀신도 두려워하며 사람에게서 나갔지요. 심지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몸에서 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의 몸에 얹어도 질병이 치료되고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보자 이번에는 주를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흉내를 냅니다.

사도행전 19장 13~15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녀 된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을 믿습니다.” 고백해도 참된 믿음의 증거가 없으면 그 권세를 누릴 수가 없지요. 곧 그 마음에 의를 이루고자 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이 “저는 여전히 나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시험 환난을 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가 없습니다. 기도에 응답받지도 못하고 축복도 받을 수 없지요. 교회에서 큰 직분을 맡고 있다 해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 믿음의 증거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율법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고 책망하시지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변질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 정죄하는 신앙생활은 외식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답게 흠이 없고 온전하여 영적 권세로 어둠을 물리치시며 장차 천국에서도 큰 영광 중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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